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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11 14:43

[리뷰] <건축학개론> 1990년대식 연애담, 그러나…


<건축학개론> 1990년대식 연애담, 그러나… 

"사랑은 궁금증이다. 여운이고 여백이다."


제주 해변 횟집에 마주 앉은 승민(엄태웅)과 서연(한가인)은 15년 만에 술잔을 기울인다. 건축 설계사인 승민은 서연의 부탁으로 얼마 전부터 제주도에 그녀의 집을 짓고 있는 참이다. 15년 전 그들은 '잠깐' 친했던 사이였다. 아니 둘은, 잠깐만 친했던 사이인 척 군다. 술이 서너 배 돌고 이런저런 안주가 나온 끝에 매운탕이 상위에 오르자 서연이 처연한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매운탕이구나. 난 내 인생이 꼭 매운탕 같아. 이걸 넣든 저걸 넣든 매운탕은 그냥 늘 매운탕이잖아. 내가 꼭 그래."

 

서연의 눈에서는 곧 굵은 눈물이 떨어진다. 승민은 그녀의 지난 삶이 녹록치 않았다는 것을 눈치챈다. 그토록 잊으려 애썼던 첫사랑이건만, 그녀에게 다시 연민의 정이 솟아나는 것이 느껴진다.

이윽고 취기가 잔뜩 오른 서연은 바닥에 와장창 넘어지고 자신을 부축하는 승민에게 냅다 욕을 해댄다. "나쁜 놈. 씨발 놈." 예쁜 입에서 험한 말이 쏟아진다. 하지만 승민은 묵묵히 그 욕을 참아 낸다. 서연이 왜 그렇게 심한 욕을 하는지 그 마음을 짐작하기 때문이다.



<불신지옥>으로 인상적인 데뷔전을 치른 이용주 감독의 두 번째 영화 <건축학개론>은 어쩌면 단 한 줄로 정리할 수 있는 내용이다. 대학 1학년 때 만난 두 남녀가 잠깐 만나다 헤어진 후 15년 만에 성인이 돼 다시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영화가 공개되기 전의 인상으로는 그렇고 그런 청춘멜로처럼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 이상의 의미와 울림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선다.

 

90년대 초중반이 배경이 되는 두 남녀의 청춘스케치는 건축과 1학년인 승민(이제훈)의 건축학개론 강의실부터 그려 나간다. 음악을 전공하는 서연(배수지)이 이 개론 강의실에 나타나면서 승민은 첫사랑의 미열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스무 살 안팎의 남자는 어리고 바보 같은 법이다. 그때 나이엔 여자가 더 성숙하고 관계를 리드하는 경우가 많다.

 

영화 속 둘의 모습도 다르지 않다. 승민은 늘 서연 곁을 뱅뱅 돈다. 과감하게 그녀에게 돌진하지 못한다. 마음은 항상 콩콩대지만, 이상한 열등감과 두려움 때문에 그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여자는 위대하고 현명하다. 어린 서연은 승민의 마음을 이미 A부터 Z까지 훤히 궤뚫은 지 오래다.



 

어린 시절의 연애가 늘 그렇듯 둘의 사랑은 오래가지 못한다. 남자는 여자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하고 여자는 남자가 이유 없이 자신을 떠났다고 생각한다. 스무 살 청춘의 사랑은 종종 지나치게 더디게 진행되지만, 이별은 순식간에 이루어진다. 승민과 서연은 서로의 마음을 속 시원하게 열어 보지도 못한 채 헤어짐의 아픔을 겪는다.

 

그런데 서연은 왜 15년 만에 다시 승민 앞에 나타났을까. 그리고 승민은 그런 서연에게 다시 한번 연정을 품을 수 있을까. 두 사람의 사랑은 과연 세월의 간극을 쉽게 뛰어넘을 수 있을까. 영화는 두 사람의 사랑의 리바이벌을 향해 조심스럽게 한발한발을 내딛는다.

 

영화는 스무 살의 시절과 서른 중반의 현재를 자유롭되 균질하게 오가며, 사랑의 영속성을 확인시킨다. 15년이라는 비교적 긴 시간이 흘렀어도 사랑은 사랑이다. 먼 길을 돌고 돌아온다 해도 사랑은 지치지 않는다. 그리고 변질되지 않는다. 대개의 사람들이 오래된 사랑과 새로운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고 방황하며, 그래서 늘 여러 사달이 나게 되는 건 그 때문이다. 사람들은 가슴 속에 여러 개의 사랑을 품고 살아간다. 사랑은 늘 중첩돼 있기 마련이며 남녀 관계를 일률적인 윤리와 도덕으로 재단하기란 어려운 부분이 많은 법이다.


<건축학개론>이 인상적인 건, 시종일관 징징대지 않고 의연하고 쿨(cool)하게 이야기를 진행시킨다는 것이다. 남자나 여자나, 과거에 둘이 헤어지게 됐던 '그 일'에 대해 따져 묻지 않는다. 다시 한번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긴 했지만 두 사람 모두 그건 그냥 거기까지일 뿐, 더 이상은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사랑이 아무리 순수하고 영롱하다 한들, 사람들 대개는 현실의 삶에 강박 돼 있고, 그걸 떨쳐내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현실을 버리고 사랑을 택한다는 건, 정말 영화 같은 얘기일 뿐이다. <건축학개론>은 따끈따끈한 신파 멜로인 척, 사실은 현실의 리얼한 관계를 그려낸다. 영화가 공감의 폭을 넓은 건 그 때문이다.




서연이 선배와 자신의 원룸에 들어가고 문이 닫히는 씬에서 이용주의 카메라는 그 이상 문안으로 진입하지 않는다. 15년 후 다시 만난 두 남녀가 결국 이해와 용서, 궁극의 사랑으로 뜨거운 키스를 나누지만, 이용주의 편집은 그다음에 바로 커트, 암전으로 처리한다. 서연은 15년 전에 과연 승민을 놔두고 선배와 잤을까. 15년 만에 만나 부둥켜안고 키스를 나눈 승민과 서연은 오래전부터 꿈꿔왔던 서로의 욕망을 채워 냈을까.

 

영화는 그 이상의 장면을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궁금증에 허덕이게 한다. 어쩌면 사랑은 궁금증이다. 여운이고 여백이다. 설명하지 않음으로 해서 오히려 두 남녀의 관계를 깔끔하게 이해하게 한다. 이용주 감독의 연출력이 빛나 보이는 건 이런 대목들에서다.

 

한때 순수의 시대라면 70년대와 80년대가 거론됐다. <건축학개론>은 그 시기를 10년 후로 설정의 키를 옮기는 데 성공했다. 이제 사람들은 순애보의 얘기를 거론할 때면 90년대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복고에 대한 트렌드도 그만큼 변화했음을 의미한다. 무엇보다 이제 영화가 1980년대의 강박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의 주체가 1990년대로 옮겨갔음을 나타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축학개론>은 70,80년대의 세대와 현재 2000년대의 세대 모두를 위아래로 아우르는 보편적 정서로 다가선다. 이 영화의 흥행 폭발력이 거의 메가톤급이라고 입을 모으는 건 그 때문이다. 단단하고 알찬 멜로 한편이 나왔다. 사람들은 한동안 이 영화 <건축학개론>을 두고 얘기들을 나눌 것이다. 짜증나는 정치의 계절에 맑고 신선한 바람이 될 것이다. 그건 누구에게나 환영받을 만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