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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영화를 論하니노나니...]

[리뷰] <가비>, 모두 다 불쌍하게 살아가는 시대에 대한 송가


<가비>, 모두 다 불쌍하게 살아가는 시대에 대한 송가

"한 여인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은 나라를 찾는 행위"


장윤현은 바보다. 그는 늘 어려운 게임을 한다. 이번 신작 <가비>를 보면 더욱더 그런 생각이 든다. 김탁환의 소설 <로서아 가비>를 영화로 만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그런 얘기를 했다. 소설은 뚝뚝 끊어서 잘도 가지만 이건 영화로 만들기에는 너무 방대한 서사라고 했다. 무엇보다 러시아 분량이 꽤 나오기 때문이다. 주인공 따냐와 일리치는 러시아에서 열차 강도로 암약하는 인물이다. 두 남녀는 일본군에게 포섭돼 고종을 암살하기 위해 조선으로 잠입한다. 주요 인물의 동선이 너무 크다. 2시간 분량의 영화로 만들기에는 쉽지 않은 얘기다. 게다가 소설의 이야기 구조를 있는 그대로 담아내기에는 제작비가 상상을 초월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장윤현은 한편으로 똑똑하다. 그래서 그는 원작에서 상당 분량을 차지하는 두 남녀의 러시아 부분을 거의 다 들어냈다. 따냐(김소연)와 일리치(주진모)가 러시아에서 벌이는 대 열차 강도 활극은 10분 안팎으로 가볍게 다뤄진다. 그리고 비교적 빠른 필치로 고종(박희순)이 피신해 있는(파천,播遷) 러시아 공사관(아관, 俄館)으로 두 인물을 옮겨 놓는다. 당초 기대와 달리 영화에서는 대륙을 오가며 진행되는 스펙타클 액션을 거의 볼 수 없다. 이 영화는 실외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는 중심 공간을 러시아 공관이라는 밀실로 설정한, 일종의 실내 영화다. 비주얼보다는 등장인물 간 심리 게임과 그 내면의 폭풍을 밀도 깊게 묘사하려는 작품이다. 영화가 공개되고 나서, 영화가 예상보다 다르다는 반응들이 나왔던 건 그 때문이다. 그래서 중요해진 것이 캐릭터다. 그리고 그 인물들을 연기하는 배우들이다. 따냐와 일리치, 고종이라는 인물의 삼각축이야말로 이 영화의 핵심 중 핵심이다. 1896년 격랑의 구한말 시대에 고종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으며, 그에게 접근한 친일 그룹 소속의 두 남녀는 왜 고종을 암살하려 했고, 또 왜 결국 그것에 실패했으며, 그 모든 과정에 어떠한 역사적 슬픔과 좌절, 분노가 담겨 있는가를 영화는 설명하려 한다.



그래서 다시 장윤현은 바보다. 영화는 종종 역사, 정치, 사회의 문제를 다루는 거대담론에 적합하지 않은 예술로 인식된다. 사람들은 영화에게서 단순한 오락을 원하며, 하지만 사실상 그 오락이라고 하는 것도 영화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1896년의 아관파천 사태를 기점으로 그 이전, 그러니까 1882년의 임오군란과 1884년의 갑신정변, 1897년의 대한제국 선포 등등 당시에 벌어졌던 혼란의 역사를 과연 지금의 그 누가 흥미롭게 바라보겠는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고종의 암살극, 그 가상의 미스터리 드라마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보면 장윤현의 <가비>는 영화에 대한 대중들의 욕망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금 이 시대의 트렌드를 무시한, 고전적이고 답답한 작품일 수 있다. 하지만 꼭 그럴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윤현은 똑똑하다. 영화 <가비>는, 일본군에 투항하다 못해 보다 더 잔혹한 킬러가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면서까지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 일리치에 대한 사랑과, 무능하고 이기적이며 기회주의적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열강들 틈바구니에서 민족의 자주와 자존을 지키려 했던 고종에 대한 연민 사이에서 방황하고 슬퍼하는 따냐의 모습에 초점을 맞춘다. 영화는 민족의 독립이라는 큰 우주의 얘기를 전개하는 척, 사실은 한 여인의 순애보적인 연정, 곧 작은 우주의 이야기로 드라마를 전개시킨다. 그녀는 어느덧 한 남자를 흠모하게 되지만 자기가 사랑하는 연인은 그 남자를 죽이려 한다. 한 남자를 살리려면 또 한 남자를 떠나야 하고 떠나려는 남자를 잡으려면 원래 목적대로 다른 남자를 죽여야 한다. 이상은 사랑을 완성시키지 못하고 사랑은 이상을 실현시키지 못한다. 영화가 자꾸 따냐의 우는 모습을 잡아내는 건 그 때문이다. 그녀가 자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건 두 남자 공히 불쌍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너무나 안 돼서, 따냐는 홀로 눈물을 흘린다. 따라서 문제를 풀어야 할 것은 결국 두 남자다. 역사적 대의와 개인의 사랑은 둘 다 숭고한 문제이다. 고종과 일리치가 극적인 만남을 이루게 되는 건 이 대목에서다.




그래서 장윤현은 똑똑한 바보다. 영화 <가비>를 관통하는 정서는 측은함이다. 가까스로 공관에 침입한 일리치는 고종에게 총부리를 겨누지만, 그의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일리치는 고종에게 소리친다. "나에게 나라 따위는 없습니다!" 하지만 한 여인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은 사실 나라를 찾는 행위와 같다. 고종은 그걸 안다. 일리치도 그 점을 안다.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매는 점차 촉촉이 젖어 간다. 그건 감정의 과잉이 아니다. 두 사람은 결국 서로가 같은 길을 가고 있음을, 같은 선상에 놓여 있음을 알게 된다.


<가비>는 볼거리가 즐비한 작품이 아니다. 대신 복잡하고 불투명한, 쇠락해 가는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측은지심을 느끼게 하는 영화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고종이 불쌍해진다. 그런 시대에 지독한 사랑에 빠진 두 연인이 불쌍해진다. 그런 시대를 과거의 역사로 갖고 살아가는 우리 자신이 불쌍해진다. 우리는 여전히 혼란스런 시대적 상황에 놓여 있으며 여전히 사랑하고, 여전히 무엇인가를 꿈꾸며, 여전히 행복해지려고 애쓰면서 살아간다. 바로 그 애처로움이 영화에 담겨 있다.

 

장윤현은 <가비>를 오락영화로 만들지 않았다. 그래서 바보다. 하지만 장윤현은 <가비>를 잊고 살아가는 역사적 문제와 고통스러운 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영화로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똑똑하다. <가비>를 지지하느냐 아니냐가, 이 영화를 만든 장윤현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고 하는 얘기가 나오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글 : 오동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