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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영화를 論하니노나니...]

[인터뷰] <돈의 맛>의 임상수 감독 & 김효진

여배우, 불온한 감독과 만나다

 

영화 <돈의 맛>을 두고 김효진은 모욕에 관한 영화라고 했고, 위험천만한 전복자 임상수 감독은 존엄에 관한 영화라고 했다. 결국 둘의 생각은 만났고, 그들은 곧 칸에 간다.



영화 <돈의 맛>과는 인연을 맞추기가 힘이 든다. 일단 국내에서는 오늘 오후 2시에 첫 시사회가 열릴 예정인데 이 새벽에 난 원고를 쓰고 있다. 무덤 안에 있는 사람들도 나오게 한다는 그 무시무시한 마감 때문이다. 그래서 난, 실로 오랜만에 영화를 보지 않고 영화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그래서 오늘의 글에서는 유독 이런 표현이 많을 것이다. ‘미루어 짐작컨대’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의 맛>과 인연 못 맞추기 상황2’는 칸 국제 영화제 일정 때문에 발생한다. 난 곧 개막일(16일)에 맞춰 칸에 갈 예정이지만 무려 11일간 이어지는 영화제 전 일정을 커버하긴 어렵다. 귀국은 23일로 잡혀 있다. 그런데 <돈의 맛>의 칸 프리미어 일정이 골 때린다. 영화제 초절정 막바지인 25일 저녁이다. 난 칸 영화제에 가지만 정작 <돈의 맛>은 내가 떠날 때 온다. 칸에서도 영화를 보지 못하게 된 것 이다. 국내에서나 해외에서나 <돈의 맛>과 나는 계속해서 엇갈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만든 임상수를 무척 만나고 싶었다. 임상수를 너무너무 좋아해서?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임상수 혹은 그의 작품은 좋다, 싫다로 양분해서 말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보다는 훨씬 복잡하고, 미묘하며, 다층적이다. 솔직히 말하면 사람보다는 작품이 더 매력적이다. 임상수는 우리 사회의 위험 분자다. 기막힐 만큼 능수능란하며 정교한 선동가이기도 하다. 그의 정파는 무슨 보수니 혹은 무슨 진보니, 무슨 무슨 당이니 하는 따위로 분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사실 세상을 바닥부터 완전히 뒤집고 싶어 하며, 1800년대 후반이나 1900년대 초반에 태어났다면 아나키스트로 활동했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다. 앙드레 말로의 <인간의 조건>에 나오는 ‘첸’ 같은 인간. 그 고독한 테러리스트. 혹은 1970년대 프레드릭 포사이드가 창조해낸 킬러 ‘자칼’ 같은 인물. 자칼은 사람을 죽일 때 자기만의 명백한 룰을 갖고 있다. 임상수도 그렇다. DC코믹스가 탄생시킨 <배트맨>에서 배트맨이 아닌 조커 같은 캐릭터. 임상수에게 고담 시는 사수가 아니라 파괴의 대상이다. 그는 홀로 다니며 세상을 전복시키려는 사람이다. 그런데 늘 조커처럼 낄낄대며 자조와 냉소를 흘리는 인간이며 그래서 오히려 더, 그 안에서 작렬하는 이성의 잣대가 차갑고 냉혹하게 느껴지는 캐릭터다. 그런 임상수의 무기는 섹스와 폭력이다. 그 두 가지가 강력하게 혼합된 엑스터시 같은 영화가 그의 최종 병기다. 그는 늘 위험한 섹스를 통한, 폭력적 반란을 꿈꾸며 살아간다. 물론 미루어 짐작컨대 그렇다.


임상수의 영화는 무엇보다 섹스에 대해 스스럼이 없다. 마치 만난 지 얼마 안 된 여자가 처음으로, 그것도 침대가 아니고 소파쯤에서 급하게 섹스를 끝내고는 발가벗은 채 거실을 돌아다니며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물 마실래요?”라고 묻는 것 같은 이미지다. 그건 포르노와는 좀 다른 느낌인데, 포르노는 그 장면에서 여자에게 치졸하게 스타킹을 입히거나(가터 벨트는 기본이다) 최소한 하이힐을 신긴다. 임상수의 영화는 말 그대로, 그냥 발가벗긴다. 그래서 보는 사람 역시 자신이 옷을 모두 벗고 있다고 느끼게 한다.


그의 2003년작 <바람난 가족>에서 황정민과 문소리는 질펀한 섹스를 벌인다. 임상수는 두 사람의 섞인 나신을 일종의 다다미 숏(일본 거장 오즈 야스히로가 창안한 카메라 앵글로 좌식인 일본 생활 문화를 감안, 무릎을 꿇은 눈높이에 카메라 시선을 맞춘 숏을 말한다)으로 잡아낸다. 거기까지는 뭐, 평범하다. 막 섹스를 끝낸 문소리가 카메라 쪽으로 몸을 돌리며 한 손으로 자신의 클리토리스를 만지며 자위를 한다. 문소리가 말한다. “아, 요즘은 꼭짓점에 느낌이 없어.” 돌아서 숨을 고르던 황정민은 그런 그녀를 넘겨다보며 다소 황당하고 혐오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세상에나. 저런 장면을 연기하려면 여배우가 얼마나 용기가 필요할까. 하지만 그보다 더 용기가 필요한 사람은 여배우에게 그런 포즈를 요구하는 감독일 것이다. 하지만 임상수는 별로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임상수는 아예 그 연기를 직접 선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바람난 가족>의 섹스 신이 최고 수위에 가깝다 한들, 성지루가 황정민과 문소리의 아들을 철거 직전의 건물 옥상에 올라가 가차 없이 아래로 던져버리는 신만큼 충격적인 장면은 없다. 황정민은 여자와 바람을 피우고 돌아가는 길에 오토바이를 몰던 성지루와 추돌 사고를 일으킨다. 교통사고 해결 과정에서 자신의 사회적 권력을 동원했던 황정민은 이 ‘값싼’ 노동자가 그 일로 앙심을 품고 극악한 복수극을 펼칠 것을 예상하지 못한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충돌은 의외의 지점에서 폭발하며, 그것은 역사성의 법칙에서 한참 빗겨나 있기 일쑤다. 임상수가 <바람난 가족>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우리 모두 꽤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사는 척하지만 그 안에 내재된 폭력이 바깥으로 노출될 때, 세상은 순식간에 허물어진다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는 잘잘못의 가치가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화 속의 그 모든 혼란은 바람난 황정민 때문인가, 아니면 아무 죄 없는 아이를 살해한 성지루가 모든 혼란의 원천인가. 문소리가 고등학생인 봉태규와 섹스를 하게 된 것은 과연 욕망 때문인가 아니면 좌절 때문인가. <바람난 가족>은 2000년대 들어 우리 사회가 좀 더 정돈돼가는 척, 사실은 더 무질서의 심연으로 빠져들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캐치한 영화다. <바람난 가족>은 임상수 최고의 작품이며 우리 사회의 옆구리에 단검을 깊이 박은 영화다. 이 영화로 사람들은 많이 당황하고 많이 불편해했다.



미루어 짐작컨대


다시 미루어 짐작컨대, 임상수의 이번 신작 <돈의 맛>은 <바람난 가족>에서 <그때 그 사람들> <오래된 정원> <하녀>에서 이어져 오는 한국의 천박한 자본주의와 그에 따른 인간형을 다시 한 번 비틀어 쥐어짜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번 영화 역시 희망보다는 반(反)희망, 기껏해야 반(半)희망 정도를 애기하는 수순일 것이다. 노출된 이야기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재벌가 노 회장의 딸인 윤여정은 돈 때문에 자신과 결혼한 백윤식이 집안의 필리핀 하녀와 바람이 난 것을 알게 된다. 윤여정은 집안의 정무비서 격인 김강우의 육체를 탐하는데 그녀의 딸인 김효진은 김강우에게 연정을 느낀다. 영화는 이 5명이 맺는 치정의 관계가 어떤 파국을 향해 치닫게 될 것인지를 뼈대로 삼는다.


<돈의 맛>은 우리 사회 최고의 상류층, 그 0.1%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지만 정작 그들의 얘기가 아니다. 임상수는 이 대목에서 다소 정색을 한다. “그 사람들은 정작 돈의 맛을 알지 못해요. 돈의 맛으로 마냥 행복해하며 살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가 않거든. 어떻게 보면 이 영화는 그 반대편에서 돈의 맛을 꿈꾸는 사람들, 99.9%에 속한 우리의 얘기예요. 우리는 재벌로 대표되는 상류 인사들이 돈의 맛 때문에 천박하고 부패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그들을 비판하는 우리 역시 사실은 돈의 맛을 느끼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을뿐이죠. 돈을 비판하려면 돈을 주는 사람이나, 돈을 받는 사람이나 각각의 개인이 존엄성을 지녀야 해요. 양쪽의 관계(사회)에 존엄성이 회복되는 것은 개인의 태도에서 시작되는 거죠.” 아마도 그래서 극중에서는 많은 부분 김강우에게 포커스가 맞춰져 있을 것이다. 김강우가 윤여정과의 혼외정사를 선택하는지, 아니면 김효정과의 멜로를 선택하는지를 잘 봐야 할 것이다. 극중 김강우의 행보가 장르 영화의 단순한 이야깃거리가 아니라는 것은 그 때문이다. 어쨌든 세상의 모든 일은 구조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실존적 노력에서 비롯된다는 것인데, 그런 면에서 임상수는 마르크스보다는 사르트르 쪽을 더 좋아하는 것 같지만 그 실천적 실존주의자와는 달리 개인의 노력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그는 낙관론자가 아니라 비관론자로 분류된다. 임상수가 냉소적인 미소를 짓는다. “그런 면에서 이번 영화 역시 임상수식 불편함이 있을 거요. 그걸 사람들이 좋아할지 그렇지 않을지 잘 모르겠어. 아마도 또 안 좋아하겠지.”


전작인 <하녀>가 그랬다. <하녀>는 한국 영화계의 기인 중의 기인이었던 김기영 감독의 1960년작을 리메이크한 것이다. 김기영의 원작과 달리 임상수는 주인공들의 계급과 계층을 초특급의 상황으로 올려놓는다. 하지만 김기영의 작품과 달라 보이게 하는 점은 그 같은 외곽의 설정만이 아니다. 차별성은 더 깊은 주제 의식에 있다. 임상수표 <하녀>의 마지막 장면은 징그럽다 못해 섬뜩하다. 하녀 전도연이 아이가 보는 앞에서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에 밧줄을 걸고 참혹하게 분신 자살한 뒤 1년쯤 지난 시점이다. 전도연을 유린하고 그녀를 강제로 낙태시킨 이정재와 서우 부부의 표정이 잔인할 만큼 평온하다. 호화 저택의 정원에서는 딸아이의 생일 파티가 열린다. 이 집안에서는 과거에 그 어떤 잔혹극도 벌어지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죽은 하녀는 잊혀지다 못해 존재가 지워졌다. ‘아랫것’들이 자신의 몸을 불사르며 시위를 한다 한들 ‘윗것’들의 일상은 그 깃털조차 흔들리지 않는다. 결코 쉽게 변하지 않는 세상. 변화에 대한 욕구는 한낱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 기막힌 좌절이야말로 어쩌면 우리가 물끄러미 지켜봐야 할 자화상의 진면목이다. 그건 정말로 불편하지만, 꽤 진실에 가까운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루어 짐작컨대


임상수 영화의 ‘세기’가 남다르고 그래서 원하건, 원치 않건 일련의 센세이션을 몰고 다닌다 한들, 김효진이 이번 영화를 선택한 것은 그 때문이 아닐 것이다. 영화판에서 책을 가장 많이 읽는 것으로 알려진 김효진이 이 작품을 고른데는 남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어요. 임상수 감독의 시나리오라고 하니까 미뤄놓지 않고 봤고 시나리오가 좋아서 선택했을 뿐이에요. 임상수 감독님이 그랬어요. 이 영화를 하면 CF도 떨어져 나갈지 모른다고요. 근데 그런 얘기를 들으니까 좀 실망스럽더군요. 이 사람도 남들과 비슷한 구석이 있네, 하고요(웃음, 임상수는 어색한 웃음).” 임상수가 보충을 한다. “어떤 여배우는 영화 속의 자기분량이 어느 정도인지에 더 관심을 보여요. 자기가 예쁘게 나오는지만 알고 싶어 하죠. 역에 상관없이 자신이 매력적으로 찍히기만을 바라요. 만약 김효진이 그런 배우였다면 이 영화를 택하지 않았을 거예요.” “좋았던 건, 임상수 감독과 그런 호흡이 잘 맞았다는 거예요. 캐릭터에 나 자신을 끼워 맞추려 하기보다는 반대로 캐릭터를 내 안으로 동화시키는 것, 처음엔 전자가 더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았어요. 진짜 연기는 후자로 한다는 걸. 영화요? 이 영화는, 글쎄요, 감독님은 인간의 존엄에 대한 얘기라고 하시지만 저는 그보다는 모욕에 대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어요. 모욕. 그래요, 모욕이에요.”


존엄과 모욕은 손바닥의 앞뒤 면이다. 인간은 원래 존엄성을 지니고 태어난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그런 존엄을 모욕한다. 모욕받은 존엄은 존엄을 되찾기 위해 더 모욕적인 일과 좀 더 존엄한 일, 양쪽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게 마련이다. 결국 감독과 여배우는 작품의 주제를 다른 편에서 정확하게 일치시키는 셈이다. 임상수 감독의 이런저런 증언에 따르면 촬영 과정에서 김효진은 가장 의연한 자세를 유지한 모양이다. 특히 예민하기로 소문난 두 거물 배우, 백윤식과 윤여정 사이에서 공손과 등거리의 관계를 꽤 잘 꾸려갔다는 것이다. 그 유연성이 남달랐다고 임상수는 말한다. 서른이 안 된 여배우로서는 보기 드문 일일 것이다. 김효진은 이번에 드문 경험을 한 번 더 하게 될 것이다. 그녀는 곧 칸 영화제의 레드 카펫을 밟는다. <돈의 맛>이 경쟁부문에 진출하는 만큼 세계 유수의 영화 기자들을 앞에 두고 기자회견도 할 것이다. 영화가 상영되면 세계 온갖 매체에서 그녀를 인터뷰하려 할 것이다. 특이한 것은, <돈의 맛>을 경쟁작으로 선정하면서 칸 영화제 집행위원장이 유례없이 영화에 대해 코멘트를 달았다는 것이다. 티에리 프레모는 이렇게 말했다. “클래식한 미장센으로 의심의 여지없이 올해 칸 영화제의 공식 선정 영화 중에서 가장 훌륭한 미장센으로 확신한다. 임상수의 카메라 작업은 전통적인 기법을 고수하며 이것이야말로 대단히 훌륭한 것으로 평가된다.” 올해 경쟁부문에는 미하엘 하네케와 켄 로치, 크리스티안 문주,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레오 카락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알랭 레네 등의 작품이 초청된다. 티에리 프레모는 이들의 영화에 임상수 영화만큼 찬사를 덧붙이진 않았다. “그런데 그건 말이오. 좀 생각해봐야 해. 유럽 영화, 특히 프랑스 영화의 전통은 다소 모호하고 실험적이잖아. 누벨바그 후예들이 그렇지. 근데 그건 이전 집행위원장인 질 자콥이 좋아한 스타일이고. 프레모는 예전 질자콥 체제의 칸을 변화시키고 싶어 해. 그래서 의도적으로 내러티브가 꽉 짜인 형태의 전통적인 스토리텔링형 영화를 앞세우는 경향을 보이는 거지. 그런 점에서 그가 내 영화를 정치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닐까?”


오, 근데 그건 지나치게 분석적이다. 그리고 평소 킬킬거리며 의도적인 가벼움을 내세우는 임상수가 사실은 늘 팽팽한 신경줄의 소유자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어찌 됐든, 칸에서의 수상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졌다는 것이 아닐까? 칸 영화제에서는 후반에 상영되는 영화가 수상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칸에서 수상을 하든, 못 하든 사실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돈의 맛>은 임상수의 또 다른 변곡점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임상수의 영화는 늘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사회의 일정 부분을 변화시켜왔다. <돈의 맛>이 돈에 굶주려 허덕대는 지금의 우리 사회에 얼마나 큰 충격파를 던질지 궁금하다. 그게 궁금해 미치겠다. 근데 영화가 개봉하면 과연 ‘돈의 맛’은 좀 보게 될까 모르겠다. 그런 얘기 하면 너무 천박해?